Noblewithbooks

편집자 노트

(Étoile Bleue Créations · 푸른별창작소)

EDITOR’S NOTE · CINEMA
2026.05.11

그녀가 돌아온 날

홍상수 감독의 신작을 개봉일에 맞춰 본 뒤, 영화와 배우, 한국어교육과 파리행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궤도를 기록한다. 어쩌면 이 글은 영화 리뷰가 아니라, 내가 다시 나의 궤도로 돌아온 날에 대한 기록이다.

드디어 내가 홍상수 감독의 신작 영화를 개봉일에 딱 맞춰 극장에 보러 갔다. 오늘 이 글을 쓰는 날은 5월 7일 목요일, 개봉일은 6일 수요일, 어제였다. 이전에도 내가 이야기했던 바로 그 극장, 작업실에서 도보로 3분에서 5분 걸리는 광교 롯데아울렛의 롯데시네마 안에 존재하는 경기인디시네마관에서 홍상수 감독의 최신작을 관람했다. 이제는 거의 홈시네마처럼 익숙해져버린 그 영화관, 1관 아르테관에서 마음 편하게 영화를 볼 수 있었다.

반복 구조의 끝에서 본 영화

<그녀가 돌아온 날>은 홍상수 감독의 전형적인 영화 연출 기법인 반복적인 구성의 끝판왕이다. 그 줄거리는 간단하다. 오랜 공백 끝에 독립영화로 복귀한 중년 배우가 세 차례 인터뷰를 하고, 그 인터뷰를 다시 연기로 재현하는 하루가 영화의 중심이다. 큰 사건보다 말의 멈춤, 기억의 빈칸, 자기 고백과 연기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관찰하는 영화에 가깝다. 홍상수 특유의 미니멀한 구조는 호불호가 갈릴 수 있지만, 이 작품에서는 한 배우의 얼굴과 시간의 흔적을 응시하는 형식으로 비교적 분명하게 작동한다.

사실 홍상수 감독의 마니아 팬이 아니라면 굉장한 인내심을 가지고 이 영화를 봐야 할 것이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에게는 딱히 권해주고 싶지는 않다. 홍상수 감독의 작품 구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왜 계속 비슷한 장면에, 비슷한 대사만 하고 있냐고 절레절레 학을 떼며 극장을 나올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단순화된 거장의 말년 양식

내겐 홍상수 감독이 영화감독으로서의 롤 모델이기에 기쁜 마음으로 그 구조를 다시 학습했지만 말이다. 거장이 자신의 작품에 대해 세월이 갈수록 단순해지는 그 광경을 목도했을 뿐이다. 피카소 그림도 말년에는 언뜻 보면 정말 초등학생이 그렸을 정도로 단순해졌다. 그래서 피카소를 잘 모르는 사람이 그의 작품을 보면, “이게 뭐야!”라는 탄식을 내뱉을지도 모를 만큼 단순해졌다. 하지만 피카소가 젊은 시절부터 얼마나 많은 습작과 놀라운 기교의 작품을 창작해 냈는지 알면 그 말년의 단순화된 작품의 의미를 더 잘 알 수 있듯이, 홍상수 감독의 요즘 작품도 그런 선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 일반 대중이 원하는 것처럼 그렇게 기교 있고 멋진 작품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못 되거나, 할 수 없어서 그렇게 단순해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의 작품관과 예술에 대한 신념이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기 때문일 것이다.

정말 요즘 계속 나오는 홍상수 감독의 작품들을 보면 점점 더 단순해지는 것 같다. 그리고 어제 봤던 <그녀가 돌아온 날>은 정말 더, 더, 더 최소화된 구조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과연 ‘영화란 무엇인가’, ‘영화는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았다. 내겐 여전히 홍상수 감독이 롤모델이긴 하지만, 나는 그 전철을 밟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초창기 홍상수 감독의 작품들에선 위트 있고, 배우들이 개성이 강하고 빛이 났다. 반복적 장면의 구성도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연출도 빛이 났고 배우도 빛이 났고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대사도 풍성했다. 하지만 요즘 홍상수 감독의 작품에는 빛나는 배우도, 풍성한 이야기도 없고, 연출만 남았다. 그것도 아주 더 단순화된 구조로 말이다.

영화는 훈계가 아니라 상징이어야 한다

영화란 정말 무엇일까. 나는 어떤 영화를 앞으로 만들어야 할까. 어제 이 작품을 보면서 영화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했다. 홍상수 감독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다 안다. <그녀가 돌아온 날>에서도 계속 반복하는 그 대사, “자신을 사랑하세요. 자신을 사랑하는 삶을 사세요. 그것이 인생의 해답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에 이백 프로 동의한다. 하지만 영화는 훈계가 아니잖은가.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좋았던 것은 훈계가 아니라, 익살스런 비틈, 위트, 그 반대 급부를 보여주면서 암시적 메시지를 날리는 거였다. 영화는 상징이어야 한다. 영화는 이미지여야 한다. 영화는 영상이 핵심이 되는 예술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제 홍상수 감독은 너무 많은 작품을 하면서 깨달은 것일까. 최고의 예술미는 단순화라고. 영화를 이렇게 초단순화한 구조 속에서 만드는 쾌감을 느끼는 것일까.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미학이 없다. 영상미가 미학적이지 않다. 단순함의 미학을 찾는다고 하더라도 아닌 것 같다. 이건 아니다. 어쨌든 이제 홍상수 감독은 내 롤모델로서의 원형은 유지하지만, 그 안에 나는 갇히길 원하지 않는다. 내가 추구하는 영화는 단순함 속에서도 잃지 않는 미학이다. 나에게는 영상미를 영화에서 포기할 수는 없다. 단순하고 단아한 풍경이라도 미학적인 부분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영화는 훈계가 아니라 상징이어야 한다.
내가 추구하는 영화는 단순함 속에서도 잃지 않는 미학이다.

배우라는 색채, 연출이라는 배치

또 영화는 배우도 중요하다. 배우에게 매력이 없으면 아무리 연출이 훌륭해도 영화 자체가 빛이 나질 않는다. 배우에게서 뿜어나오는 카리스마, 조용한 카리스마라도 존재해야 한다. 사람 중에는 외모, 미모, 육체적 매력 말고도 그 인간 자체에서 뿜어나오는 개성과 매력이 존재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다. 인기가 있고, 아니고를 떠나, 신인이고 기성이고를 떠나서 사람에게서 넘쳐나는 매력, 그런 카리스마를 가진 사람이 배우를 해야 하고, 그런 배우를 넣어야 그 영화에 색채가 나오고 빛이 난다. 흑백영화, 컬러영화를 말하는 게 아니다. 노파심에 말하는 것이다. 배우의 색채, 홍상수 감독의 초기 작품들에는 그런 배우의 결이 영화에 녹아 있었다. 그러나 요즘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에는 그런 배우적 요소가 다 빠져버린 듯하다. 홍상수 감독은 이제 혼자만의 힘을 믿는 걸까. 연출만으로도 영화가 완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하지만 어떤 배우를 배치하느냐도 결국 연출의 힘이 아닐까 생각한다. 쉽게 구할 수 있는 배우를 넣는 것도 중요하지만, 배우는 감독의 장기말뿐인 역할을 하는 건 아니다. 배우는 비록 장기말일뿐이라도 독특한 개성이 있고 빛나야 한다. 그 자체, 인간 자체에서 뿜어나오는 매력이 있어야 연출을 살려준다. 배우가 튀어야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감독이 만드는 그 영화의 분위기에 맞춰 그 배우의 색의 농도를 조절하는 게 바로 감독의 역량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배우 자체에서 그런 색을 일단 뿜어내는 기본 바탕이 있어야, 그 우물의 근원이 있어야 뭘 길어올리든 말든 할 게 아닌가.

홍상수 감독의 신작들이 이렇게 점점 더 단순화되고 연출만 남을 뿐인데도 나는 여전히 홍상수 감독의 작품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린다. 홍상수 감독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여전히 궁금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노년에는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찾았는지 그 메시지도 역시나 몹시 궁금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영화에서는 너무 자기변명처럼 들린다. 물론 난 언제나 홍상수 감독의 사생활에 대해 영화 감독으로서의 재능과 상관없는 개인의 자기 선택이라고 변호하지만, 이번 영화에선 뭐랄까, 조금 반감이 들었다. 자기변명이 너무 심하다. 하지만 그 마음은 백 프로 이해한다. 진짜 사랑을 매번 하고 싶어서 또 다른 선택을 한 것이라고. 남들이 다 사는 것처럼 살기 싫고, ‘진짜’를 누리는 삶을 위해서 선택한 거라고 백 번 이해를 하지만, 그걸 또 영화에 드러내는 직설적인 메시지를 듣고 있자니, 나 역시 홍 감독의 비겁한 변명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차라리 그 메시지를 상징화하고 영상으로 이미지화해서 전달하는 방법을 선택했더라면 이렇게 반감과 저항감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꼰대처럼 영화에서 직설적으로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 너무 싫었다. 이제 홍상수는 상징의 대가에서 훈계하는 꼰대가 된 것인가. 자기 삶에 대한 대중으로부터의 비난에 대해 훈계하고 변명하고 싶어진 걸까. 그것도 직설적인 메시지로 말이다. 나는 홍상수 감독이 이 영화에서 전해주고 싶어 안달이 난 그런 직설적 메시지들의 내용에 대해서는 이백프로 공감하지만, 그 전달 방식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영화가 왜 존재하는가. 영화는 직설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공간이 아니다. 영화는 상징이어야 한다. 그렇게 쉽사리 배우의 입에서 반복적으로 전달하려면 그냥 강연을 듣는 게 나을 것이다. 책을 읽는 게 나을 것이다. 우리는 왜 영화를 보는가. 텍스트화되거나 발화되는 메시지를 상징화해서 고순도의 영상적 이미지로 작품화하여 전달해야 관객에게 미학적으로 전달될 수 있다. 그게 영화의 역할이고 존재 의미인 것 같다. 나는 죽을 때까지 영화에서 영상미와 상징적인 가치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배우의 개성도 놓치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에선 덜 익은 배우들의 풋내나는 어설픈 몸짓, 너무 계산적이라고 보여지는 행동들이 정말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인공적인 불편함이 있었다. 영화는 보고 있는 관객이 영화라고 느끼지 못할 것처럼 자연스러워야 한다. 배우들의 몸짓이나 행동이나 대사가 말이다. 영화가 아니라고 느껴야 한다. 연기라고 느끼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연기처럼, 저건 백 프로 연기다, 라고 느끼는 순간 그 배우의 존재 가치는 그 영화에서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쉽게 구할 수 있는 인연들에서 너무 매몰되는 감독이 안쓰러울 뿐이다. 그걸 자신의 연출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한계다. 현실적이든, 어떤 상황이든 그건 한계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홍상수 감독의 작품이 좋다. 그리고 여전히 기다려진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는 홍상수 감독처럼 구조적 미학을 추구하는 영화 작품이 드물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한계가 있다. 영화 감독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한계가 더 극대화되는 수도 있다. 여러 한계 상황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홍상수 감독 영화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 그리고 늘 느끼는 거지만, 홍상수 감독이 주장하는, 혹은 전달하는, 혹은 인생에서 느끼는 그 감흥과 메시지의 내용에는 이백 프로 공감이 가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그와 잘 통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홍상수 감독의 신작이 여전히 그립고, 또 간절하게 기다려진다.

무대처럼 좁아진 영화의 공간

그런데 홍상수 감독의 이번 신작 <그녀가 돌아온 날>은 연극적 연출 기법이 떠오른다. 무대 장치도 거의 변화가 없는 연극 세트 말이다. 그런 연극적 요소를 이번 영화에 넣은 것이 아닌가 싶다. 영화를 보는 것보다 연극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간혹 들었다. 마치 전설적인 연극인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는 듯이 무대 장치는 단촐했고, 변화가 없었고, 반복적인 대사만 이어졌다.

나는 이번 영화에서 홍상수 감독이 도교적 철학의 핵심인 선문답에 심취를 했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홍상수 감독의 최근 신작 몇 편에서 벌써 선문답 형태의 싹이 트고 있었다. 그런 주제 의식 말이다. 인생을 도교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그런 흐름이 이미 나타났다. 이번 영화에서는 보다 더 직설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아무리 일반 대중이 홍상수 감독 영화를 선뜻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양보를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타협도 해선 안 된다. 설명하려고 들면 이미 그건 영화가 아니다. 그 메시지는 설명이나, 훈계로 전달되어서는 안 되고 영상적 이미지로, 상징으로 전개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철학 이후

어쨌든 그 전달 방식의 기교적인 면을 떠나 내용을 보자면, 나는 이미 홍상수 감독이 노년에 터득한 그 삶의 철학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내내 공감이 되었던 건 그것이다. 나는 본질 그대로의 삶을 보고 애쓰지도, 뭔가를 꼭 이뤄내고자 하는 삶을 살지 않았다. 홍상수 감독은 그걸 노년에야 깨달았지만, 나는 이미 청소년 시절부터 존재의 본질을 찾기 위해 헤맨 끝에 그걸 일찍감치 터득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왔고, 이제는 정반합의 그 구조처럼 선불교를 뛰어넘어, 도교적 사상을 뛰어넘어 그다음의 새로운 질서를 스스로 창조하는 구역에 도달했다.

인생은 정해진 틀에 맞춰 꾸역꾸역 젊음을 소비할 필요는 없다. 남들이 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그 인생의 틀을 고수할 필요도 없고, 자기를 사랑하면서, 오로지 자기를 사랑하면서 그렇게 진실된, 인간 본연의 본질로서의 삶에 충실하면 된다. 그것은 사람들이 멋대로 만들어 놓은 그런 가공적인 질서가 잡힌 세계에서 일단 자신의 관점을 옮기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있는 지렛대는 홍상수 감독이 이번 영화에서 말하듯이 “자신을 사랑해야 하는” 그 지점이 출발점이다. 하지만 도교에서 말하는 그 지점, 결국 나는 그 구역을 넘어서 있다. 혼돈의 우주처럼 이제 자신을 내던져놓으면 ‘자유’, 그 지점에서 출발해서 스스로 질서를 창조해야 한다. 이제 그 구역으로 진입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바로 그 깨달음의 순간이 오는 것이다. 그게 선불교 다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여전히 이 지점은 “자신을 사랑하는” 그 생각이 근본 바탕이다.

어쨌든 나는 계속 내 세계관을 발전시킬 생각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내가 앞으로 파리에서 만들 영화 속에 녹여낼 것이다. 직설적 대화로서가 아니라, 상징적인 이미지와 함께 제시할 것이다. 요즘 나는 이러한 내 목표를 위해 나아가고 있다. 홍상수 감독은 반드시 애써 이뤄내야 할 것도 없다고 말한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꼭 이뤄야 할 것은 인생에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남는 게 시간 아닌가. 인생에서 꼭 이뤄내야 할 것은 없고, 그렇기에 스스로 감옥을 만들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남는 게 인생이고, 시간이기에 그냥 즐기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 가면 된다. 남들이 그걸 어떻게 생각하든, 세상의 기준에서 그게 중요한 일이든 아니든간에 스스로 원하면 그 길을 가면 된다. 그런데 그 길을 완주하지 않았다고 해서, 못했다고 해서 그리 자책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인생에서는 꼭 애써서 이뤄야 할 것들이 없기 때문이다. 인생의 본질을 깨닫고 나면 홍상수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걸, 그 순간을 이해할 수 있다. 홍상수 감독은 영화에서 딱 한번 그 순간을 맞이했고, 그 다음부터는 그렇게 살 수 있고 볼 수 있는 힘이 생겼다고 하는데, 나는 매 순간 그 깨달음과 함께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하면, 청소년 시절부터였다고 말하고 싶다. 수많은 독서와 사색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이었고, 일찍부터 철학을 전공하면서 더 확신에 가득 차게 되었다. 인생에서는 많은 부분이 세상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가짜 해답으로 가득하다는 걸 말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나의 길을 걸어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중간고사 이후, 다시 궤도 위로

요즘도 나는 나의 길을 잘 걸어가고 있다. 파리로의 내 계획은 순조롭게 잘 진행되는 중이다. 이제 사이버한국외대 한국어교육학과 첫 학기의 중간고사도 모두 끝났다. 난 잘 해냈다. 이젠 수업과 과제물, 시험까지 한 바퀴를 돈 셈이다. 방송대에서는 중간고사는 과제물로 대체하는 경향이었고, 그 결과 시험을 기말고사 때 한 번 치고 나면 그 학기가 끝나서 쉼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시스템이 달라서 중간고사, 기말고사가 있어서 중간고사가 끝나도 바로 동영상 수업이 제공되었다. 매주 새롭게 제공되는 영상 수업을 제때 못 들으면 지각으로 처리되고 감점이 된다. 방송대 때에는 그 학기 동안만 영상 콘텐츠 수업을 다 들으면 되었는데, 여기에서는 일주일인가 그 시기를 넘기면 안 된다. 그래서 중간고사가 끝나자마자 쌓여 있는 수업을 듣느라 쉬지도 못했다. 이제 겨우 다 따라잡았고, 정상적인 루트로 들어섰다. 하지만 한 바퀴 돌고 나니까 이제 익숙해졌고, 제법 만만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시스템에 완전히 적응한 것이다.

이번 중간고사는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 그리고 결과도 좋다. 물론 전체 학기로 볼 때는 중간고사 성적이 30% 정도 들어가도록 구성되어 있다. 출석 10%, 과제물 10%에서 20%, 중간고사 30%, 기말고사 30%에서 40% 정도로 되어 있는데, 학과목마다 그 비율에는 차이가 약간씩 있다. 어쨌든 시험을 한번 치르고 나니까, 자신감이 붙는다. 이제는 이 시스템에 완전히 동화되어서 오래전부터 마치 내가 이 공부를 해온 느낌이다. 나는 항상 시스템에 적응되면 좀 만만하게 보는 경향이 있고 안주하는 버릇이 있지만, 이번에는 좀 다를 것이다. 난 한국어 교사 자격증을 꼭 제 시간 안에 따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내 파리행에 지장이 없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만만하게는 보되, 끝까지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이제는 적응이 되어 부담감이 사라졌다는 말과 같다.

국어에서 한국어교육으로

사실 한국어는 정말 잘 아는 분야가 아닌가. 특히 나처럼 맞춤법에 신경을 쓰면서 평생 살아온 사람으로서, 또 직업적 특성으로서 보통 사람들보다는 전문가 축에 속한다. 그래서 만만하긴 하다. 하지만 국어와 한국어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국어는 만만한 영역이지만, 한국어는 한국어를 전혀 모를 외국인들에게 잘 전달해서 가르쳐야 한다는 미션이 있다. 그걸 생각하면 절대로 한국어가 국어처럼 만만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이번에 교양 과목은 하나도 없이 전공과목으로만 다 수강 신청을 했다. 앞으로 남은 학기도 그러할 것이다. 그래서 겹치는 내용이 많다. 이번 학기는 기초 문법과 교육학 일반적인 개론 수준으로 가득 차 있어서 사실 그렇게 깊은 내용은 없다. 그리고 내용이 문법적인 부분은 계속 반복되고 있어서 시험공부를 할 때 그게 한편으론 고달팠다. 나는 반복되는 내용을 꾹 참고 최선을 다해 공부했다. 그래서 자꾸 반복해서 공부한 끝에 한국어 문법을 내 뼈에 새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젠 디테일한 부분까지 한국어 문법을 익혔다. 보통 살면서는 놓칠 수도 있는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반복해서 공부하니까 이제는 외국인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설명하면 좋을지도 방향이 분명해졌다. 일단 나중에 현장에서 직접 수업을 진행할 때 기존의 설명 방식으로 정상적인 수업을 진행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만의 비법을 설명해준다. 프랑스인들의 뇌구조에 딱 맞는 그런 내용으로 말이다.

프랑스어 사용자를 위한 한국어 설계도

지난 2년 동안 프랑스어 공부를 열심히 하다 보니, 내 뇌도 프랑스어에 특화된 면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한국어가 너무 어렵게 느껴졌다. 원래 한국어 문법이 어렵기는 하다. 왜냐하면 일관된 질서가 없기 때문이다. 세종대왕은 그 제자원리를 아주 과학적으로 잘 만들어 놓았지만, 후대에 와서 현실에서 적용할 때 완전히 가지치기가 너무 되어서 일관적인 설계도가 없는 것과 같다. 그래서 나는 프랑스인들에게 맞는 한국어 교육의 설계도를 마련해서 매 시간마다 따로 제공할 생각이다. 일반 기존의 수업대로 80프로 진행한 다음에 나머지 20프로 정도에서 프랑스어 사용자가 잘 전달받을 수 있는 내 방식의 비법의 설명을 내놓을 생각이다. 물론 그때그때마다 고안해서 전달할 것이다. 그리고 그걸 현장에서 진행해보고 학생들의 반응과 학습 효과를 임상실험해 본 뒤에 결과가 좋은 걸로 한국어 교재를 새롭게 집필하고 제작할 생각이다. 내가 한국어 교육 수업을 들으면서 매번 느끼는 것은 이대로는 절대로 한국어를 세계화하기에는 장벽이 너무 높다는 것이다. 외국인들의 뇌 회로에 전혀 맞지 않는 수업 방식인 듯하다. 뭔가 질서가 필요하다. 그 설계 구조를 세우는 것이 나의 시대적 사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내가 제일 잘하는 부분이 설계이다. 구조를 만드는 것. 이 싹이 언제부터 났는지 되돌아 짚어보면, 좀 웃기는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중학교 2학년 때가 생각난다. 이상하게 내가 시험 계획표를 세우면 시간도 많이 남고 훌륭한 시험 계획표가 탄생해서 그 소문이 주변 친구들에게 났다. 그래서 애들이 다 나에게로 와서 시험 계획표를 짜 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친한 친구들의 시험 계획표를 내가 다 짜주고 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부터 내 설계자 면모가 나타난 건 아닌가 싶다.

뭔가 질서가 필요하다.
그 설계 구조를 세우는 것이 나의 시대적 사명이 아닌가.

어쨌든 그 능력이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나온 것이 아닌 듯하다. 왜냐하면 나는 설계의 왕인 MBTI의 INTJ-T이기 때문이다. MBTI를 안 믿는 사람도 있겠지만, 여튼 그 분석적 성향과 연관이 있다는 말이다. 나는 그 재능을 최대한 발휘해서 앞으로 한국어 교재의 설계를 제대로 해볼 생각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어 교사 자격증을 계획대로 잘 획득해서 파리 현장에서 수업을 해보면서 임상 실험을 계속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 계획은 이미 앞에서도 말했듯이 잘 진행되고 있다. 중간고사까지 치르고 나니까, 앞으로는 정말 시간 문제다. 이런 식으로 계속 가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중간고사까지 있으니까 한 학기가 두 학기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3학년에 편입을 해서 총 4학기만 하면 되는데, 느낌상 8학기를 하는 기분이다. 중간고사가 끝나면 한 학기를 다한 것처럼 진이 빠지기 때문이다. 그만큼 내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뜻이리라. 나는 그만큼 이번 한국어 교육자로서 사명감을 느끼고 책임감을 갖고 있어서 미래의 내 학생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새로운 교재를 개발하겠지만, 기존의 지식은 다 습득해야 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알고 있는 내용을 인내심 있게 듣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인내심이 많이 요구되는 일이다. 백 프로 알고 있는 건 아니고, 나머지 몇 프로 모르는 걸 위해서 열심히 잘 챙겨듣고 있다.

한국어 교사의 진입 장벽

그런데 힘든 일이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어 교사, 진입 장벽 높다고 말하고 싶다. 일단 학비부터 일반 대학처럼 비싸지 않는가. 거기서 일차 진입 장벽이 생긴다. 물론 나는 백프로 다 유공자 자녀 장학금으로 처리되어서 제로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시간의 문제다. 일반 직장인들은 도저히 소화를 못할 것 같다. 나는 직장인이 아니라서 그나마 다행이다. 그래서 내가 잘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매학기 6과목이나 듣고 있을 수 있는 것도 내가 시간이 널널하기 때문이다. 직장인이었으면 나는 절대로 이 과정을 이수하지 못할 것 같다. 수업을 다 듣고, 과제물을 내고, 시험을 준비하는 게 결코 쉽지 않다. 게다가 6과목씩 하는 건 정말 어렵다. 힘들다. 솔직히 정말 힘들고 시간과 노력을 많이 투자해야 한다. 그래서 단언컨대, 한국어 교사 자격증의 진입 장벽이 낮지 않다. 나처럼 뚜렷한 목표가 없다면 결코 다들 쉽게 해내지 못할 것 같다. 그리고 우리 사이버외대 한국어교육학과 교수님이 오리엔테이션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한국어 교사를 해서 큰돈 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한국어 교사를 하려는 사람들은 다 착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좀 페이소스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큰돈 되지도 않는데, 그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사명감으로서 말이다. 그러니 다들 착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일면 맞는 말이다.

그런데 사실 나는 나름의 계획이 따로 있지 않는가. 한편으로는 떼돈을 벌 수도 있을 한국어 교재 개발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어 교사를 파리에서 지렛대로 삼아 내 출판 사업을 더 폭넓게 이어갈 것이고, 거기서 대박을 칠 수도 있다. 또 파리에서의 한국어 교사라는 정식 직업의 그 영역을 발판으로 삼아 프랑스 영주권도 노려볼 수 있다. 그리고 파리에 살면서 주말과 방학을 활용하여 유럽 전역을 여행할 계획도 세우고 있다. 그럼 나는 착한 사람이 아닐까. 하지만 나도 착한 사람이다. 그런 전략과 목표를 갖고 있지, 그 자체가 목표는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어를 세계에 전파하려는 사명감과 책임감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내 계획대로 한국어 교재를 만들어 떼돈을 반드시 벌 거라는 결과도 장담할 수 없다. 앞서 홍상수 감독이 이번 영화 <그녀가 돌아온 날>에서 강조하듯이 인생에서 꼭 해내야 할 건 없다. 그래서 나도 집착하지는 않는다. 하다가 봐서 그렇게 되면 좋은 일이고, 전략과 계획 안에는 속해 있지만 그게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는 그런 생각의 감옥은 없는 것이다. 어쨌든 나는 우리 교수님 말대로 ‘착한 사람’이다. 돈에 구애받지 않고 한국어 교사로서 세계 속에 우뚝 서려고 하기 때문이다. 사명감을 갖고 세계로 나서려고 하기 때문이다.

요즘 뉴스를 보면 세계의 정세가 참 현란하게 돌아간다. 어떤 위기가 닥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우리 시대에 제3차 세계대전이 터지지 말란 법도 없다. 그런데 아주 솔직히 말하면 한반도보다는 파리가 안전하다. 이런 안전을 향한 마음도 있다. 그렇다고 내가 착한 사람이 아닌 것은 아니다. 착한 사람이라고 해서 자신의 생존 본능을 추구하지 말라는 법도 없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요즘 국내 뉴스를 보면 참 할 말이 많긴 하지만, 입을 꾹 다물려고 한다. 왜냐하면 앞으로 일 년 후에 파리지앙으로서 살아가면 난 그 뉴스의 범위 영향권 안에는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현실적 이유로서 입을 다물어야 한다. 왜냐하면 앞으로 한국어 교사로서 국가 기관의 일부인 세종학당에서 일할 수 있어서 입을 다무는 게 좋다. 세종학당이나 한국어교육의 관할은 주로 문화부 소속이기 때문이다. 문화부는 어디냐, 아시다시피 국가기관 중 하나다. 이제 나는 정치적인 부분에서는 별로 입에 담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나는 청정지역인 언어의 세계 속에 힘을 쏟을 생각이기 때문이다. 내가 예상하는 대로 한국의 정치적 판도가 흘러가고, 세계의 흐름이 달라지고 있지만, 내가 몇 마디 보탠들 뭐하랴. 달라질 것도 없는데. 그냥 현실적 이익이나 보호하자, 그 생각이다. 괜히 몇 마디 던졌다가 세종 학당에서 일자리를 못 구하는 사태가 발생하면 나의 파리지앙의 삶에 근원적인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극장이 다시 일상의 중심이 되다

사실 이번 중간고사 이후로 총 네 편의 영화를 봤다. 중간고사 기간중에서 마지막 한 과목을 남겨주고 하루가 비길래 미리 예매해 두었던 영화를 보러 갔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 마지막 한 과목은 ‘기초 문법’이라서 너무 여러 번 공부해서 머리에 쉰내가 날 정도라 하루 땡땡이를 친다고 해서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리고 중간고사가 끝나고 나서 <비발디와 나>, <두 검사>, <그녀가 돌아온 날>까지 본 것이다. 일주일에 두 편 정도 본 셈이다. 요즘 SK브로드밴드의 기본 영화 보기 서비스도 해지를 했기에 그 요금에서 한 2만원 더 보태면 한 달을 기준으로 볼 때 일주일에 두 편씩 봐도 괜찮다. 요즘은 극장에서 영화를 보다 보니, TV로 영화를 보는 게 별로 안 내킨다. 50인치 TV도 너무 답답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TV로는 그냥 예능 같은 걸 보고, 영화는 꼭 영화관에 가서 보기로 했다. 그래 봐야 금액도 얼마 안 들기 때문이다. 바로 경기인디시네마가 근처에 있는 덕분이다. 한 편에 5천 원, 얼마나 저렴한가. 정말 좋은 동네에 살고 있다. 영화 마니아인 나에게 이 동네만큼 좋은 동네도 없다. 거기다가 대자연과 인공미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광교호수공원이 있어서 매일 산책하며 힐링도 할 수 있고, 갤러리아 백화점에, 롯데아울렛에 쇼핑 센터도 바로 근처이고, 정말 이만큼 살기 좋은 동네도 한국에 없을 듯하다. 물론 서울로 출퇴근을 나는 안 하기 때문에 더 안락하지 싶다. 물론 마음만 먹으면 지하철로 강남까지 24분 걸리기 때문에 딱히 교통이 나쁜 것도 아니다. 사실 광교의 이 동네는 서울의 알짜배기 지역을 제외하면 웬만한 서울 외곽보다 집값이 높다. 대장주급·상급 단지의 경우 20억대에서 30억대까지 거론되고, 강남·용산·성수 같은 핵심 입지를 빼면 서울 신축·준신축과도 가격대가 겹친다. 물론 나는 1인 가구이고, 오피스텔에 작업실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집값에 영향을 받지 않고도 이 동네의 인프라를 다 이용할 수 있다. 내가 한국의 여러 곳에서 살아봤지만, 광교는 정말 여러 모로 우리나라에서 살기에 좋은 동네가 아닐까 싶다.

네 편의 영화, 네 개의 질문

참 이번에 본 영화에 대해 잠시 품평하자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는 1편에 비해서 꽤 지루했다. 1편과 똑같은 구조를 갖고 있어서 신선함이 훨씬 떨어졌다. 나는 굉장히 지루하게 봤다. 또 <비발디와 나>는 별로 기대를 안 하고 갔지만, 꽤 나름대로 괜찮은 영화였다. 한 여인이 어떻게 독립적으로 성장하고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는지 잘 보여주었다. 과연 한국 사회에 저 정도로 독립적인 여자들이 많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그리고 <두 검사>는 꽤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명작이었다. 어떤 사람에겐 지루하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아주 쫄깃한 영화였다. 결과를 예상할 수 있었지만, 연출력이 놀라워서 너무 영화 내내 긴장이 되었다. 그리고 과연 이 영화의 주인공처럼 사는 것이 맞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스탈린 시대의 참지식인을 보여주는 영화였는데, 나는 정말 그렇게 용기 있는 선택을 못 할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렇다고 달라지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라면 그냥 외국으로 피했을 것 같다. 그냥 진실을 호도하는 국내에 있지 않고, 외국으로 나가서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을 구축했을 것이다. 참을 거짓으로 바꾸고, 무지한 대중을 달콤한 말로 속이면서 권력만을 탐하는 국내에 있으면서 진실을 외친다면 그 결과는 뻔하다. 그냥 외국으로 나가서 권력의 영향력이 적은 곳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때가 왔을 때 진실을 외치는 게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그냥 개죽음이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정말 너무 쫄깃한 영화다. 이런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데. 나도 이런 단순하지만 놀라운 연출력으로 긴장감과 묵직한 생각을 던져주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파리에서 영화를 공부하면 꼭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내 안에 이미 그 씨앗이 자라서 나무가 되어 있어서 프랑스어로 색을 입히면 충분히 가능할 거라고 본다. 늘 말하지만, 나는 프랑스어만 잘하면 내가 원하는 걸 다 얻을 수 있다. 어쨌든 홍상수 감독이 있어서 내가 영화 감독의 꿈을 꾸게 되었고, 그의 최신작 <그녀가 돌아온 날>을 개봉일에 딱 맞춰 내가 관람했다는 사실은 내 삶이 지금 아주 안정적인 궤도에 올랐다는 것을 반증한다. 요즘 나는 도교적 삶의 철학 위에 나만의 생철학을 입혀서 사상적으로는 아주 안정적인 궤도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현실적으로도 나에게 족쇄였던 고리들도 하나, 둘 다 정리를 해나가고 있고, 최근까지 큰 족쇄가 또 하나 사라졌다. 놀면 뭐 하나. 요강이나 깨지. 이런 우스갯소리도 있는데, 놀면 뭐하겠나. 공부를 하고, 족쇄나 하나씩 깨나가면 되지. 이번에도 나의 전략은 통했다. 코로나 19 이후에 엉망이 되어버린 나의 현실적 시스템을 시간이 지나면서 생태계가 복원되듯이 아주 서서히 돌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 시스템은 코로나 19 이전보다 더 안정적으로 되어가고 있다. 물론 시간이 꽤 걸리는 작업이었다. 시간이 다 해결해주는 거였다. 그리고 그 시간을 견디며 나는 공부를 했다. 그냥 시간만 견디면 내겐 남는 것이 없는 세월이지만, 공부를 하니 나는 저 멀리 미래에 가 있게 된 것이다.

결국 남는 것은 공부와 이동의 힘

코로나 19 이후 내게 무엇이 자산인가. 온전히 내것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고 세운 전략이었다. 나의 재능은 의외로 공부하는 거였다. 그 재능을 이제까지 썩히고 있었던 셈. 그만큼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공부 영역이 없었다. 그리고 한국에서 하는 공부란 다 그 방법과 목적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래서 난 내 재능을, 유일한 나의 자산을 썩히고 있었는데, 코로나 19가 전환점이 되면서 공부를 하기 시작해서 난 원하는 길로 순조롭게 잘 가고 있다. 시간은 흐르고 족쇄는 풀리고, 나는 세계로 나아갈 자격이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올 한 해만 지나면 웬만한 건 정리가 다 될 것 같고, 파리로 가서 유로화를 벌면서 또 계속 나의 앞날을 개척해나갈 생각이다. 그리고 그건 한국에서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더 활발하게 잘 진행될 것이다. 사실 사람은 어디에 있느냐가 참 중요하다. 자기가 잘 적응할 수 있고, 잘 살아갈 수 있는 곳에서 살아야 한다. 자기와 영혼의 색깔이 비슷한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살아야 더 삶이 알찰 수가 있다. 그 결과물도 좋고 말이다. 가치관과 세계관이 비슷한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살아야 더 삶이 풍요로울 수 있다. 앞으로 나는 내 재능을 더 잘 발휘하여서 더 풍성한 삶을 살 생각이다. 요즘도 내 삶에 꽤 만족하지만, 현실과 타협해서는 안 된다. 비슷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 틈에서 살아야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더 말하고 싶은 것은 많지만, 그냥 입을 닫아야 한다. 이제는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앞으로 하고 싶은 말을 굳이 입을 닫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살고 싶다. 내 생각을 그대로 뱉어도 되는 곳에서 자유롭게 살고 싶다. 물론 한국어 교사이고, 한국 사람이기에 한국의 상황과 결코 분리될 수는 없겠지만, 세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일단 나가보면 더 많을지도 모른다. 일단은 그 지렛대가 되어줄 한국어 교사로서의 공식적인 자격을 확보하고, 사명감과 책임감을 갖고서 한국어 교재는 만들고, 그다음에 더 넓은 세상에서 더 흥미로운 일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영화는 나의 존재적 영역이기도 해서 그걸 굳이 새로 거론할 필요는 없다. 영화는 내 인생의 필요충분조건이라서 항상 전제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출판은 이미 획득한 영역이라서 늘 꾸준히 가는 것이고, 마음만 먹으면 책을 쓰고 집필할 수 있는 환경이니 말이다. 그게 내가 이제까지 이룩해 놓은 자산이 아닌가. 여튼 삶은 아름답다. 앞으로 아름다운 영화를 만들 일만 남았다. 하지만 인생은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고, 더 많은 경험이 나를 기다린다. 우선 파리, 파리부터 ‘잘 아는 동네’로 만들어야지. 그리고 그다음으로 넘어 가야지.

우선 파리, 파리부터 ‘잘 아는 동네’로 만들어야지.
그리고 그다음으로 넘어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