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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노트

(Étoile Bleue Créations · 푸른별창작소)

EDITOR’S NOTE
2026.02.23

에릭 로메르 감독
자연광의 철학

얼마 전에 에릭 로메르 감독의 <레네트와 미라벨의 네 가지 모험(4 Aventures de Reinette et Mirabelle, 1987)>을 SK브로드밴드에서 보았다. 무료다. 엄밀하게 말하면 매달 월정액 서비스 안에 포함된다. SK브로드밴드에는 에릭 로메르 감독 작품이 꽤 여러 편 올라와 있다. 내가 넷플릭스나 디즈니는 끊어도 SK브로드밴드는 월정액을 유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좋은 작품들을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작품을 보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처음 나를 프랑스 영화로 끌어들였던 한 편의 영화를 떠올렸다. <녹색 광선(Le Rayon vert), 1986>이 나를 프랑스 영화의 세계로 이끌었고, 결국 나를 파리로 이끌게 한 계기였다.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이 영화를 처음 만난 지 거의 20년이 지난 지금, 나는 <레네트와 미라벨의 네 가지 모험>을 보며 뜻밖의 감각을 경험했다. 예전에 이 영화를 반복해 본 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로메르의 대화 리듬과 인물의 선택 방식을 이미 체득했기 때문에 다음 대사가 자연스럽게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만큼 그에게 익숙해져 있었다. 그것은 내가 오랫동안 영화를 보며 쌓아온 시간이 하나의 감각으로 응축되었음을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이제 나는 로메르의 영화 문법을 따라가는 관객이 아니라, 그 문법의 구조를 읽어내는 관객이 되어 있었다.

이제까지 에릭 로메르 감독의 영화를 계속 반복해서 보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봤던 수많은 프랑스 영화와 또 여러 다른 영화들, 20년 동안 영화는 나의 가장 오래된 훈련이었다. 그 시간이 오늘의 감각으로 이어진 것이다. 처음 에릭 로메르 감독의 <녹색 광선>을 봤을 때는 그냥 잘 알지 못하고 그저 ‘꽂혔다!’

프랑스 영화가 이때부터 좋아졌는데, 왜 좋아하냐고 물으면 정확하게 설명은 할 수 없는 단계였다. 그리고 그 이후 계속 프랑스 영화를 기회만 되면 봤는데, 왜 프랑스 영화가 내 취향에 맞는지 이렇게밖에 설명을 못 했다. 담백하고, 큰 자극이 없이도 철학적 사실을 담고 있다. 생각할 거리가 있다. 풍경이 너무 아름답다. 항상 생각을 자극하는 요소가 있다. 자극적인 사건은 없어도 사고를 자극하는 영화 구조다. 이런 식으로 설명이 가능했다.

로메르의 리듬을 이해하는 순간, 나는 비로소 빛을 체득하고 있었다

그런데 <레네트와 미라벨의 네 가지 모험>을 이번에 보고 깨달았다. <녹색 광선>에 나오는 그 이야기가 이 영화에서 또 나왔던 것이다. <레네트와 미라벨의 네 가지 모험>, 이 작품은 누벨 바그 시절 동료였던 프랑수아 트뤼포, 자크 리베트, 장뤽 고다르 등이 만들었던 초기 단편 영화의 감각을 떠올리게 한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각 에피소드는 영화와 현실, 자연과 도시, 말과 이미지 등 로메르를 특징짓는 요소들로 채워져 있다.

쥘 베른의 소설에서 ‘녹색 광선’에 대한 모티브를 얻었다는 로메르 감독. 난 이 감독이 이야기하는 동틀 무렵의 그 느낌을 알 수 있다.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프랑스 예술에서 왜 이토록 ‘빛’이 중요한지를. 에릭 로메르의 ‘녹색 광선’은 결국 빛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프랑스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네 역시 우리가 잘 아는 인상주의의 선구자격인 화가다.

예전에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우리가 열심히 암기하지 않았던가. 인상주의 화가의 이름을 암기하고, 인상주의 화풍을 암기하고. 하지만 그때는 왜 인상주의에서 ‘빛’이 중요한지 그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 의미를 제대로 설명해 주는 선생님도 없었다. 우린 그저 열심히 ‘외워야’ 했다. 그리고 시험 문제의 답만 맞추면 그뿐이었다. 그런데 방송대에 편입해서 프랑스언어문화학과를 졸업하기까지 또 모네를 많이 맞닥뜨렸다. 그때에야 비로소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클로드 모네(Claude Monet)는 1872년에 그린 〈인상, 해돋이(Impression, soleil levant)〉라는 작품에서 항구 위로 떠오르는 태양과 안개 낀 아침의 빛을 거칠고 빠른 붓질로 포착했다. 이 그림은 1874년 전시에서 한 비평가가 조롱 섞인 의미로 “그저 인상에 불과하다”라고 비판하면서 ‘인상주의(Impressionnisme)’라는 명칭이 붙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모네의 의도는 대상의 세밀한 윤곽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의 빛과 공기의 떨림, 눈에 들어오는 감각의 변화 자체를 화폭에 옮기는 데 있었다. 그는 실내가 아니라 야외에서 직접 빛을 관찰하며 같은 풍경을 시간대별로 반복해서 그렸고, 그 결과 색채는 고정된 사물이 아니라 빛에 따라 변하는 현상으로 드러났다. 인상주의는 그렇게 ‘무엇을 그렸는가’보다 ‘어떻게 보았는가’를 앞세운 회화적 태도로 자리 잡았다.

그래서 왜 고흐의 그림에서도 선명한 윤곽선보다 짧고 강한 붓질이 반복되는지 이해가 된다. 빛은 사물을 고정시키지 않고 끊임없이 흔들기 때문에, 그것을 따라잡기 위해 화가는 긴 선으로 천천히 윤곽을 그리기보다 빠른 붓의 리듬으로 순간을 붙잡는다. 물론 고흐는 쇠라처럼 점묘법을 체계화한 화가는 아니지만, 그의 그림 역시 빛의 떨림을 색채와 붓의 호흡으로 옮기려는 시도였다. 학교에서는 이런 맥락 대신 이름과 연도만 외우게 했다. 빛이 왜 형식을 바꾸는지에 대한 설명은 거의 없었다.

이 ‘빛’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실감하게 된다. 그림뿐 아니라 문학과 영화에 이르기까지 빛은 그저 배경이 아니라 사유의 조건이 된다. 인간이 태양을 신처럼 여겼던 이유를 굳이 종교적으로 해석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빛이 사라지면 세계의 형상도 사라진다는 사실을. 예술은 어쩌면 그 빛을 이해하려는 오래된 시도인지도 모른다.

자연광은 장면을 비추는 기술이 아니라 세계를 대하는 태도였다

다시 ‘빛’으로 돌아가 보자. 에릭 로메르 감독의 ‘녹색 광선’도 역시나 태양이 처음 올라오는 그 ‘빛’에 대해 이야기한다. 쥘 베른의 소설 <녹색 광선(Le Rayon vert, 1882)>에서 제목을 차용한 로메르 감독. 모네가 중시한 빛은 영화 안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다. 에릭 로메르 감독은 인공 조명을 최소화하고 자연광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식을 고집했다. 그것은 장면을 꾸미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는 배우의 얼굴을 극적으로 조형하지 않는다. 대신 빛이 스스로 얼굴을 바꾸도록 둔다. 구름이 지나가면 표정도 바뀌고, 해가 기울면 대사의 무게도 달라진다. 인물의 감정이 아니라, 시간과 빛이 장면을 움직인다.

<레네트와 미라벨의 네 가지 모험>에서 다시 ‘녹색 광선’의 이야기가 스쳐 지나가는 순간,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프랑스 영화를 좋아했던 이유는 서사가 아니라 이 ‘태도’였다는 것을. 현실을 과장하지 않고, 설명하지 않고, 설득하지도 않는다. 그저 빛이 비추는 만큼만 보여준다. 인상주의가 대상을 해체한 것이 아니라, 대상 위에 드리운 빛을 관찰했던 것처럼, 로메르는 인간을 해부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 위를 스치는 빛을 지켜본다.

그래서 자연광은 기술이 아니라 철학이다. 세계를 통제하지 않겠다는 선언. 인물을 조명으로 규정하지 않겠다는 선택. 순간을 억지로 붙잡지 않고, 지나가도록 두는 태도. 어쩌면 내가 프랑스 영화를 통해 배운 것도 이것인지 모른다. 사물을 선으로 고정하지 말 것, 점처럼 흩어지는 순간을 허용할 것.

이제야 나는 이해한다. 왜 ‘빛’이 프랑스 예술의 중심에 있었는지를. 모네의 캔버스에서, 로메르의 프레임에서, 그리고 녹색 광선이 스쳐 지나가는 그 짧은 순간에서. 그것은 단지 자연 현상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었다.

에릭 로메르는 프랑스 누벨 바그(Nouvelle Vague)의 핵심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장뤽 고다르, 프랑수아 트뤼포와 함께 영화의 형식을 해체하고, 스튜디오 중심 제작 방식을 벗어나 거리와 일상으로 카메라를 끌어낸 세대다. 누벨 바그가 추구했던 것은 거대한 세트나 조명이 아니라, 현실의 시간과 공간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는 것이었다. 로메르 역시 그 흐름 안에 있었다. 다만 그는 고다르처럼 급진적 형식 실험으로 나아가기보다, 일상의 대화와 자연광 속에서 인간의 선택을 탐구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래서 로메르의 영화는 혁명적이면서도 조용하다. 그의 변화는 격렬한 실험이라기보다 일상을 오래 바라보는 태도에 가까웠다. 형식은 달라졌지만, 그 변화는 언제나 낮은 목소리로 드러난다.

과장하지 않고 관찰하는 방식, 빛이 인물을 대신 말하게 두는 영화

이 지점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홍상수 감독을 떠올린다. 실제로 해외 평론에서도 에릭 로메르를 이야기할 때 홍상수의 이름이 함께 언급되곤 한다. 두 감독 모두 거대한 사건을 만들지 않는다. 대신 일상의 대화, 어색한 침묵, 사소한 선택의 순간을 집요하게 따라간다. 인물을 설명하기보다 인물이 스스로 말하도록 두고, 조명과 음악으로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다. 로메르가 자연광 속에서 인물의 윤곽을 흐리게 두듯, 홍상수 역시 인물을 극적으로 조형하기보다 카메라를 약간 떨어뜨린 채 지켜본다. 그래서 두 감독의 영화에는 ‘과장’ 대신 ‘관찰’이 있다. 빛을 인위적으로 조형하지 않는 태도, 사건을 확대하지 않는 태도, 인물을 단정하지 않는 태도. 내가 두 감독을 모두 좋아하는 이유는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야기를 소비하게 만드는 영화가 아니라,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가 앞으로 만들 영화 역시 이 태도를 따르게 될지도 모른다. 인공 조명으로 세계를 조형하기보다, 자연광이 허락하는 만큼만 담아내는 방식. 설명하지 않고 관찰하는 영화. 통제하기보다 기다리는 영화. 빛을 다루는 방식이 곧 세계를 대하는 방식이라면, 그 안에는 나의 철학도 스며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