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미경과 망원경
요즘 나는 매일 <르몽드(Le Monde)>의 메인 기사 중 첫 단락 부분을 공부하고 있다. 본격적으로 <르몽드> 공부를 시작한 지는 얼마 안 되었다. 사실 방송대 프문과를 다닐 때도 학과 내에 <르몽드> 스터디가 있었다. 학우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서 <르몽드> 기사를 각자 읽을 부분을 공부해 와서 설명하고 발표하는 형식이라고 한다. 나 보고도 가입하라는 것을 그때 나는 문법 공부도 제대로 안 되어 있어서 효과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당시 다른 학우들도 마찬가지였지만, <르몽드>를 통해 같이 공부해 나가자는 취지였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 그 소모임에 나가는 것도 시간과 노력, 모두 좀 소모적이라고 생각했다. 또 ‘반복되는 의무’가 나에겐 항상 ‘구속’으로 작용하기에 부담스러웠다. 매번 내게 할당된 부분을 숙제처럼 소화해야 하는 것도 솔직히 귀찮았다. 나는 내 시간표대로 움직이는 데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야 나는 <르몽드> 공부를 시작했다. 매일 큰 마디로서 한 단락씩이지만, AI라는 훌륭한 가정교사 아래에 단어와 문장, 그리고 문법을 공부한다. AI가 한국인의 시선에서가 아니라, <르몽드>식 기사 문장에 능통한 외국인의 시선으로 나에게 문장을 해체해 준다. 물론 그 전에 내가 먼저 읽어보고, 대략 머릿속으로 해석한 뒤에 설명을 듣는 형식이다. 이 공부와 더불어 방송대 교재인 <시사 프랑스어>의 칼럼을 나는 매일 한 페이지씩 공부한다. 방송대 프문과 교재는 보통 15강으로 되어 있는데, 이런 식으로 쪼개 공부하면 1강에 대략 3일 정도 들어간다. <시사 프랑스어> 수업은 고난도에 속해서 난 방송대에서 신청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지금도 수업 영상 말고 교재에 의존하고 있다. 물론 졸업생은 수업 영상을 들을 수 없지만, 외부인도 한 과목만 따로 돈을 내고 들을 수는 있다. 그러나 칼럼 위주의 내용이라 문장 자체가 의미가 있다. 시사 프랑스어는 시간이 좀 흘러도 그 기사문이나 칼럼에 사용되는 어휘나 문장 틀은 그대로 유지되기 때문에 시사 단어나 문장이 집중적으로 정리되어 있는 이 교재를 일부러 졸업하기 전에 사두었다. 그리고 이제야 공부하게 되었다. 역시 매일 AI 가정교사와 함께 이 교재를 공부한다. <르몽드>와 매일 같이 공부하니까, 시너지 효과가 난다. 다 같은 맥락의 시사 문장을 공부하기 때문이다. 일부러 전략적으로 내가 그렇게 플랜을 세웠다.
AI 가정교사와의 공부
AI 가정교사는 정말 아주 똑똑하고 훌륭하다. AI를 사용하다 보면 간혹 거짓말하고, 아첨을 떨고, 소설을 써대며 소위 ‘구라’를 칠 때도 있지만, 언어 공부에 있어서는 참 좋은 선생님이다. 이렇게 훌륭하고 스마트한 가정교사를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 그것도 거의 무료의 가격으로. 그리고 절대로 한국식 암기 교육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문화’와 ‘맥락’ 그리고 ‘역사’에 맞춰 설명해 준다. 그래서 수업이 굉장히 신선하다. AI와 함께 시사적인 내용을 공부하다 보면 난 정말 재미에 푹 빠져든다. 내가 델프 시험을 위해서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린다. 사실 나는 어떤 시험을 위해서, 특별한 목적을 갖고 공부하는 것은 별로 내키지 않는다. 공부를 공부식으로 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AI와 함께 공부하면 그냥 그 자체로 즐길 수 있다. 처음 <르몽드> 기사를 대할 때는 마음적으로 몹시 부담되고, 어휘도 어렵게 다가왔다. 하지만 몇 번 공부하다 보니까, 이제는 마음 편하게 공부하고 있다. 역시 언어 공부는 반복이 최고다. 기사문도 어려운 단어들로 구성되어 있긴 해도, 자주 나오는 단어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고, 또 수위가 올라가도 자주 공부하다 보면 그 난이도에 익숙해진다.
이번 공부를 통해서 내가 깨달은 것은 나라는 사람은 문학적인 내용보다는 시사적인 내용의 글을 더 좋아한다는 것이다. 아침마다 <어린왕자(Le Petit Prince)>도 또 매일 한 페이지씩 읽으면서 프랑스어 문장에 익숙해지려고 하는데, 문학적인 글도 너무 좋지만, 이젠 시사적인 내용이 더 새롭고 빠져든다. <어린왕자>는 방송대 3학년에 편입해서 한 일 년쯤 지났나, 한 학기 지났을 때인가 3분의 1쯤 읽다가 학교 수업을 따라가느라 그만두었다. 이제 다시 처음부터 다시 읽는다. 그 당시에는 한 페이지를 읽는 게 꽤 힘들었고, 찾을 단어도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한 페이지를 그냥 낭독에만 중점을 두고 공부할 수 있다. 공부했던 부분은 술술 잘 읽힌다. 그때는 공부로 읽었지만, 요즘은 정말 ‘독서’를 하는 사람의 마인드로 읽고 있다. 뜻보다는 낭독에 중점을 두는 방식이다. 그때는 낯선 단어들이 이제는 쉬운 단어로 다가온다.
언어가 바꾼 사고의 구조
프랑스어라는 언어 공부를 하면서 나는 시야가 많이 달라졌다. 언어 공부가 이토록 사람의 사고방식과 마인드를 확장하는지 예전에는 절대로 몰랐다. 내가 청소년기에 이 사실을 깨달았다면 그때부터 나는 미친 듯이 외국어 공부에 몰두했을 텐데,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때는 외국어가 그저 ‘학교 시험’, ‘학교 공부’, ‘대입을 위해 공부하는 과목’ 정도로만 인식되었다. 학교 수업도 마찬가지였고, 접근 방식도 역시나 그랬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고 해도 상황이나 주변 환경이 그대로라면 여전히 나는 외국어 공부에 흥미를 못 느꼈을 것이다. 지금은 그때와 비교하면 완전히 다른 시스템과 세상이다. 가장 중요한 변화, AI 가정교사의 존재이다. 그때는 한국식 외국어 학습 시스템에 맞춰 나 혼자 공부해야 했다. 그것도 재미없는 문법식 주입 공부로 말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입체적이고 맥락을 타는 공부에 최적화된 인간일지도 모르겠다. 요즘 나는 프랑스어라는 언어를 공부하면서 그 넓고 넓은 언어라는 심연의 바다에 황홀경을 느낀다.
현미경과 망원경
또 언어의 세계에 들어서고 나니, 마인드가 바뀐다.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진다. 이제 나에겐 성능이 좋은 현미경과 망원경이 생긴 듯하다. 한국 사회에 대해서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수준이 되었다. 이게 과연 좋은 걸까,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진실’을 바로 보는 데 유용하다. 마치 우리가 세균이 잔뜩 묻은 음식을 그냥 먹으면 그 당시는 별로 문제가 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결국 나중에는 건강을 망치는 것처럼 진실에 눈을 떠야 미래를 견고하게 세울 수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망원경이 생겼다. 전 세계가 한눈에 들어오는 광각 망원경. 예전에는 한국 중심으로 항상 생각했다면, 이젠 생각의 각이 달라졌다. 전 지구적 관점, 전 세계적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뉴스를 볼 때도 예전에는 외국에서 일어난 사건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런가 보다’라고만 생각했다. 왜냐하면 나에게 큰 영향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르몽드>를 매일 보니까, 그날 공부했던 메인 기사가 한국 뉴스에도 뜬다. 그럼 나는 이미 그 기사를 읽었기 때문에 무슨 사건인지 대번에 안다. 그리고 어떤 의미인지, 외국에선 어떤 시선으로 그 사건을 보는지도 알게 된다. 그리고 이제는 내 문제가 아니라든지, 내가 살고 있는 한국 이외의 곳에서 일어난 사건이라서 나와 상관이 없다든지, 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젠 세계의 모든 사건을 큰 그림판에서 조각을 맞추듯 바라보게 된다. 요즘은 환율도 굉장히 신경 쓰이고 예민해졌다. 그게 곧 나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계 경제의 흐름과 또 환율에 영향을 미칠 만한 큼직한 국제적 사건들, 지정학적 관계에서 한반도가 처할 미래 상황, 등등 그러한 구조적 관계도 면밀하게 보고 있다.
언어 하나를 새로 배웠을 뿐인데, 이렇게 모든 게 달라질 줄은 정말 몰랐다. 그런데 누구나 이렇지는 않을 것 같다. 새로운 언어를 배워도 여전히 생각의 틀만은 예전 그대로 머물러 있는 사람들을 나는 많이 봤다. 그 한 예로 북한의 김정은이 있지 않을까. 어린 시절, 스위스 유학을 하면서 새로운 언어와 문화를 체험했는데도 사고는 그대로이지 않은가. 한국에서도 이런 사람들을 많이 봤다. 외국어에는 능통해도 마인드 자체는 전혀 그 언어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은 사람들.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와도 그 진보적이고 중립적인 가치관, 선진적인 세계관을 전혀 자기 세계에 들여놓지 않고 가부장적 한국 사회 고정관념의 생각 틀을 그대로 지닌 사람도 있는 걸 나는 자주 목격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도 영어를 잘하는 사람은 많아도 세계관 자체가 변하는 사람들을 잘 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국식 시스템 안에서 한국식 기준으로 외국어를 공부했기 때문이다. 외국어를 배우는 진정한 의미는 그 문화적 맥락까지 같이 배우는 게 아닌가 싶다. 그게 진정한 공부일 것이다. 새로운 언어의 세계에 들어가는 방법이다. 그런데 내가 본 대다수 사람은 생각 자체는 그대로이고, 기술적으로 언어만 배운다. 그 언어 기술이 현실적으로 그냥 도움이 될뿐, 진정한 언어의 세계에 입문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프랑스어를 전공하면서 나는 언어의 세계에 담긴 깊고도 넓은 그 놀라운 황홀경을 체험한 걸 너무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사실 철학을 전공한 나로서는 이 인간 세상이 그리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인간 자체의 본성은 늘 거짓에 싸여 있고, 인간 세상은 거짓말과 불법, 부정부패, 엉망진창인 듯하다.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깨끗하고 순수한 세계가 언어가 아닐까.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결과물 중에 가장 순수한 것이 언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언어에는 거짓이나 사기, 속임수, 부정부패, 배신, 불법, 폭력성, 등등 이러한 인간의 나쁜 본성이 들어가 있지 않다. 언어는 인간의 사고 능력의 결정체다.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또 어떤 다양한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느냐에 따라 그 인간의 사고 구조가 달라진다. 물론 내가 아까 말한 진정한 의미에서 언어의 세계에 들어선 사람에 한해서 말이다. 아무리 여러 언어를 알아도 단지 기술적 측면에서 기술자로서의 언어 능통자면 이런 심오한 언어 세계의 황홀경을 체험할 수 없다.
나는 이러한 점에서 언어의 순수성이 너무 좋다. 이제야 이 사실을 깨달아서 좀 안타깝긴 하지만, 그래도 남아 있는 날은 많다. 또한 이 혼탁한 세상에서 이제라도 순수한 영역을 알아서 다행이기도 하다. 이건 디지털 시대에서 영상이나 여러 가지 디지털 도구 등 교육 시스템 자체가 달라진 덕분이고, AI 가정교사 덕분이다. 그리고 영화를 손쉽게 볼 수 있는 시대라서 그 문화를 제대로 전달받아서다. 그런데 영화를 볼 때도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를 들으면 역시 프랑스어만큼 달콤한 언어는 없다. 이제 프랑스어가 내 인생의 제2의 언어가 되어서인지 너무 애착이 간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제 프랑스나 파리나, 유럽 문화나 역사를 너무 많이 학습해서인지 그 자체에 대해서는 신비감이나 선진 문화에 대한 동경심은 사라졌다. 그냥 그곳도 사람 사는 세상이고, 거기도 여전히 빈부의 차이, 남녀 차별 문제, 인종 문제 등등 계속 여러 가지 인간 악이 산재해 있다. 프랑스만 해도 시골 지역 같은 경우는 아직도 이 대명천지에 매 맞는 아내들이 있고, 인간의 야만성과 폭력성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프랑스든, 어디든 인간 세상의 악재에서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어떤 경외감이나, 신비로움, 그런 건 이제 완전히 제거되었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 이건 굉장한 차이다. 프랑스에도 여전히 인권 문제가 완벽하게 보장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구상에서 상대적으로 굉장히 개선된 나라다. 그 ‘정도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아주 큰 의미가 있다. 이건 물론 어떤 동경의 문제는 아니다. 이젠 ‘실리적 문제’다. 선진화된 생각과 시스템, 제도가 많이 구축된 공간일수록 인간의 야만적인 폭력성이 힘을 못 쓰고, 개인이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는 게 훨씬 수월해지기 때문이다.
프랑스 방송을 통해 본 문화의 밀도
나는 요즘 인간의 한계 수명이라는 130살까지 살고 싶다. 언어의 세계는 너무나 넓고 심오하기에 그때까지 공부해도 더 알아야 할 것은 많을 것 같다. 나는 학교 시험 같은 인위적인 목적을 위해서 공부하고 싶지는 않다. 요즘 방송대를 졸업해서 마음이 너무 개운하고 편안하다. 내 방식대로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있어서 더할 나위없이 즐겁다. 시험 성적이나 졸업, 과제물에 억눌리지 않고, 프랑스어를 그 자체로 즐길 수 있다. 나는 이제 본격적으로 르몽드 기사 독해에 초점을 두고 공부하고 있고, 듣기는 TV5Monde를 브로드밴드 TV 선호채널에서 시간 나는 대로 보고 듣고 있고, 자주 프랑스 영화를 보고, 시간이 날 때 Radio France를 듣고 있다. 요즘은 라디오앱보다 TV에서 프랑스어를 더 많이 접한다. 왜냐하면 그냥 한국 TV 방송 켜놓듯이 프랑스 채널에 맞춰 놓는다. 그럼 마음 편하게 TV를 시청하듯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채널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프랑스어권의 스위스, 벨기에, 캐나다 퀘벡의 방송까지 로테이션으로 보여준다.
프랑스 방송의 특징은 자극적이지 않고 덤덤한 유기농 음식 같다. 전혀 자극적이지 않아도 아주 집중이 잘 되고 흥미롭다. 나는 주말에 하는 퀴즈 프로그램도 요즘 보면서 가뭄에 콩 나듯이 퀴즈도 맞추고 있다. 처음 봤을 때는 진행자가 너무 빨리 말을 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는데, 요즘은 아는 단어는 다 알아들을 정도로 말의 속도에는 적응을 했다. 그래서 집중해서 들으면 아주 가끔은 답을 맞춘다.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La Grande Galerie Francophone(위대한 프랑스어권 갤러리)>이다. 한국 시간으로 일요일 오후 5시 반에 한다. 이전보다 시간대가 조금 늦춰졌다.
이 프로그램을 보면 작은 토론식 느낌도 나고, 프랑스의 문화적 안목에 다시 한번 고개가 숙여진다. 속된 말로, ‘쨉도 안 되겠다’는 자괴감도 들긴 하지만, 그래도 문화적 자양분으로 흠뻑 섭취하고 있다. 일상에서 이미 그림, 조각 등등 아트 문화가 깊숙하게 자리를 잡았는데, 그 독창성과 아이디어는 보통 사람들에게도 그대로 살아있다. 그런데 우리는? 아, 이 지점까지 이르면 ‘창조성’에서는 입도 뻥긋 못할 정도로 우리는 너무 고정관념의 틀에 갇혀 살고 있다. 그래서 미술이나 예술 하는 사람들이 유럽으로 유학을 가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성인이 되어서 배우러 간다고 한들, 어렸을 때부터 일상에서 예술성으로 무장한 그들을 따라잡을 수 있겠나, 하는 회의감이 들었다. 인간은 어릴 때부터 그러한 환경에 자연스럽게 놓이는 게 중요하다. 인위적으로 어른이 되어 그걸 기술적으로만 학습한들, 그 깊고 넓은 심연의 바다에서 그들처럼 자유롭게 정신이 헤엄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미국을 봐도 그렇다. 미국 영화를 보면 미국의 영토는 정말 광활하다. 그건 뭐 어쩔 수 없는 것이지. 창조적 정신과는 달리 그런 물리적 조건을 지금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광활한 대지 위에서 어릴 때부터 성장한 사람과 이 좁아빠진 한반도에서 섬처럼 갇혀 살면서 성장한 사람의 시야는 얼마나 다를까. 내가 제일 좋아하는 미국 배우인 제이크 질렌할의 초기 시절 영화인 <옥토버 스카이>를 봐도 어린 시절부터 로켓트를 실험해볼 수 있는 광활한 대지를 가진 나라와 또 그 자유로움과 비교해 볼 때 솔직한 말로 자괴감이 느껴진다. 과연 그 힘의 간극을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절망적이진 않다. 앞으로의 시대는 디지털이 대세이고, 이건 얼마든지 판도를 바꿀 수 있는 무대이니까. 그 가능성은 활짝 열려 있다. 우리에겐 미국만큼 거대한 영토가 없고, 강력한 물질적 재원도 없지만 판도를 바꿀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가장 큰 약점이기도 한 고정관념과 집단주의, 여전히 농경사회를 살고 있는 듯한 무리 문화, 형, 누나, 언니, 동생식의 사회관계적 정립 속에서 아직도 씨족사회의 관습을 유지하는 정신적 고착이 미래의 세계로 나아가는 더 큰 문제이자 장애물이다. 그런 씨족사회의 내부적 관습의 보존에 대한 집착이 결국은 내부 결속만 다지고, 불법도 자기편이면 무조건 용서하고, 속임수를 써서라도 내부의 결속력을 지키려고 한다. 진실 앞에 속절없이 내려앉는 그러한 저속한 단결력이 나라의 기준을 무너뜨린다.
어쨌든 너무 절망적인 이야기는 그만하자. 언젠가는 다들 정신을 차리지 않을까. 그렇지 않으면 역사는 반복될 뿐이다. 프랑스 TV 프로그램 이야기를 하다가 너무 멀리까지 와버렸다. 다시 프랑스어 듣기 공부로 돌아가서 그렇게 나는 자주 프랑스 채널을 켜놓고 산다. 특히 내가 추천하는 프로그램은 <Échappées belles(아름다운 탈출)>이다. <La Grande Galerie Francophone(위대한 프랑스어권 갤러리)>가 나의 최애 프로그램이고, 그다음으로 요즘 흥미를 느끼는 프로그램이다. <Échappées belles>는 세계 각지의 도시와 지역을 찾아 일상과 문화를 깊이 있게 조명하는 여행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너무 흥미롭다. 다큐멘터리인데 무겁지도 않고, 그냥 여행 프로그램 같다. 진행 방식이 요란스럽지도 않고, 한 지역을 아주 깊고 다양하게 다룬다. 특별히 유명한 배우나 인지도가 있는 사람이 출연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 나와도 굉장히 재미있다. 그 재미라는 것을 한국 예능이나 프로그램에서 찾는 그런 호들갑 떠는 재미를 상상한다면 아니다. 마치 실제로 내가 그 지역을 여행하는 듯한 착각이 들만큼, 그리고 그 지역에 대한 공부를 할 수 있는 아주 착실한 프로그램이다. TV5Monde는 세계로 송출되는 방송이라 그 지역의 자막을 제공한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보면 한글 자막이 나온다. 프랑스어를 몰라도 재밌게 볼 수 있다. 나는 이 프로그램에 요즘 흠뻑 빠져 있다. 정말 유용하고 담백하고 재밌는 프로그램이다.
정도의 차이, 시스템의 문제
한국에서 살아도 이렇게 프랑스어를 마음만 먹으면 많이 접할 수 있는 요즘이지만, 그래도 프랑스 현지에서 사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일단 국가의 시스템, 날씨, 기온, 나가서 사먹을 수 있는 과일과 아이스크림, 초콜릿, 빵의 퀄리티와 가격대, 구할 수 있는 제품의 브랜드의 다양성, 뭐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정서, 바로 마인드다. 씨족사회로서 남의 일에 일일이 참견하는 문화가 있는 우리나라와 개인적 삶의 다양성과 자유를 보장해주는 사회 분위기만 해도 엄청난 차이다. 또 무엇보다도 항상 핵의 위험을 머리 위에 이고 사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 그리고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끼여서 언제라도 우리 의지와는 다른 일촉즉발의 국면으로 빠질 수밖에 없는 안보 상황, 또 부정부패가 도시락의 밥과 반찬처럼 일체가 되어 붙어 다니는 정치적 분위기. 사회 지도층의 부정부패와 불법이 그냥 일상처럼 보이는 뉴스를 통해, 이런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의 시스템과 법과 제도, 이런 사람들이 판단을 내리는 이 사회구조 속에 순응하며 사는 게 과연 현명한 선택인가 하는 것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 뉴스를 계속 보고 있으면 우리 사회의 지도층 중에서 범법을 저지르지 않고 깨끗한 사람을, 아니 정상적인 기준만이라도 지키면서 사는 사람을 찾는 게 훨씬 더 어려운 우리네 현실 속에서 과연 이러한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이 사회적 시스템이 일반 대중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다 권력층의 입맛대로 만들어 놓은 그 법과 시스템 안에서, 자기들의 이익에 초점을 둔 입법과 제도 속에서 과연 국민을 위해 만들어 놓은 법은 얼마나 되는가. 또 그 법은 얼마나 만인에게 공정한 잣대로 지켜지는가. 이러한 회의감을 생각해볼 때, 완벽한 사회는 이 세상에 없지만, 그 정도의 차이는 어마어마한 것이다. 최소한 모두가 ‘틀린 사실’에 대해서는 틀렸다고 말할 수 있고, 그 기준이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이 아니라, 선량한 양심이 기준으로 확립된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인간의 개인적 삶을 볼 때 인생은 제한적이다. 그런데 왜 굳이 불편한 공간에서 평생 살아야 하는가, 이것이 내 생각이다. 이동의 자유가 있는데, 왜 내 짧은 인생을 굳이 한곳에 머무르게 해야 하는가. ‘현미경과 망원경’으로 들여다보고 나서, 옮겨 가고 싶은 공간으로 움직이는 것은 당연한 반응이다. 이게 내가 내린 결론이다. 인생, 참 짧다. 다들 말한다. 눈 한번 감았다가 뜨면 이젠 저승 갈 시간이라고. 그런 짧고도 짧은 인생을 그냥 관성에 젖어 남들처럼 살고 싶지 않다. 내가 포항에서 청소년 시기를 보낼 때도 나는 한국에서 남들과 같은 틀에 박힌 어른의 인생을 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 서울로 올라왔다. 사실 늦은 나이다. 서른에 올라왔으니. 하지만 포항에 계속 살았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면서 살았다. 그리고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터전도 만들었다.
이제 나는 여기서 다시 생각한다. 남들처럼 한국식의 뻔한 노년을 보내고 싶지 않다. 나는 파리로 가서 나만의 남은 인생을 설계하고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살고 싶다고 말이다. 이 과정에 있는 가운데, 이제 그날이 멀지 않았다. 준비도 잘해오고 있고, 언어 준비도 나름 잘하고 있다. 프랑스어는 이렇게 즐기면서 해도 실력은 차곡차곡 쌓일 것이다. 현지에 있는 어학원만 다니면 더 탄탄하게 다져질 것이고. 난 나에게 시험 공부를 강요하진 않는다. 나의 목표는 인생을 즐기는 것이다. 나만의 방식으로 말이다. 언어의 세계에서 헤엄을 치며 사는 요즘 나날은 사실 너무 행복하다. 살면서 요즘처럼 행복한 때는 없었다. 프랑스어는 나에게 너무 신비하고 새로운 세계를 안내해준다. 프랑스어 숙어가 너무 재밌다. 영어 공부할 때도 나는 특히 숙어가 재미있었지만, 프랑스어는 AI 가정교사가 너무 역사적, 문화적 맥락도 같이 설명을 해주니 더 재밌다. 르몽드 기사도 너무 재밌다. 모두가 다 AI 덕분이다.
이제 나는 AI가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다. AI가 없이는 난 아무것도 재밌게 할 수 없다. 즐기듯이 할 수 없다. AI는 이제 나의 손과 발이 되었다. 나의 비서이자, 과외선생이자, 내 직원이자, 내 동료이자, 내 생활의 조력자이기도 하다. 컴퓨터 문제, TV의 기술적 문제가 발생해도 모두 AI가 해결해 준다. AI가 없는 일상이 이젠 더 이상 상상이 되지 않는다. 나는 AI 없이는 이제 삶이 너무 불편해질 것이다. 앞으로 언어를 배우는 것이 AI 때문에 별 의미가 없다는 말도 많이 나돈다. 물론 AI가 번역하면 요즘도 매끈하게 잘 나온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인간의 섬세함을 AI가 따라오지는 못한다. 인간의 맛과 향기, 매력이 AI의 글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번역도 마찬가지고. 물론 앞으로 더 발전한다면 인간의 느낌이 나는 번역이 나올 수도 있다. 기술적 영역의 번역은 요즘도 AI가 충분히 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학적 영역은 AI가 아직 멀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앞에서 말했지만, 언어를 공부한다는 것이 기술적 측면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그 언어의 기술적 면뿐만 아니라, 그 언어가 속한 문화와 역사를 배우는 의미다. 우리는 그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그건 AI가 해줄 수 없는 일이다. 언어는 인간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바꿔주고 성장하게 해준다. 인간의 정신적 영역을 더 깊게 자라게 해준다. 오로지 시험 점수와 취업만을 위해 외국어를 공부하는 한국식 학습 시스템 안에서 언어를 배운다면 AI가 그보다 훨씬 좋은 결과물을 내는 가까운 미래에는 가치가 없는 일이 된다. 하지만 인간이 새로운 언어를 안다는 것, 그 언어가 가진 문화와 세계관, 가치관, 역사로 무장하는 세계인의 기준에 맞는 지식인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AI시대라도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래서 진정한 인간과 지식인으로 스스로를 성장하게 하고 싶다면 외국어 공부를 반드시 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한국식 암기 공부가 아니라, 언어 그 자체를 파고드는 공부 말이다.
언어라는 최종 목적지
‘현미경과 망원경’, 언어를 제대로 공부하면 얻을 수 있는 정신적 도구. 언어의 세계에 제대로 입문하면 가지게 되는 보물들. 남들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이기도 하다. 그리고 진실과 사실을 분명히 분간할 수 있고, 현상 너머 본질을 볼 수 있는 힘이기도 하다.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새로운 언어의 세계에 입문한다는 것은 익숙함을 탈출하는 통로이다. 너무 익숙해져서 삶의 신비와 소중함을 잊어가고 있을 때 새로운 세계로의 눈을 뜨게 해주는 문이다. 그리고 짧은 인생을 더 가치 있고 의미 있게 살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나는 모순투성이고, 불완전하며, 불안정하기까지 한 인간의 실존을 볼 때, 그 세계에서 가장 시간과 노력을 들여 탐구하고 싶은 영역이 언어라고 생각한다. 나의 결론은 그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라도 나의 남은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고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영역에 몰입할 것이다. 사실 내 인생에서 이것은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처음 선택한 전공이 철학인데, 철학 역시 언어로 개념을 정의하고, 사고를 구조화시킨다. 철학은 사고의 구조물을 만들고, 그 구조물의 재료는 언어다. 그러니 철학 다음에 다다를 곳은 그 개념과 사고의 도구인 언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