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blewithbooks

철학 기반 창작, 출판 프로젝트

(Étoile Bleue Créations / 푸른별창작소)

← 돌아가기

The Green Ray

녹색 광선

프랑스 영화에 대한 감각이 시작된 순간

나는 이 영화를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처음 만났다. 그때 나는 직장인이었고, 여름 휴가 일주일을 통째로 비워두었다. 하루에 한 편이 아니라, 하루에 여러 편의 영화를 연달아 보았다. 아침에 들어가 밤이 되어 나올 때까지, 그 일주일 동안 나는 거의 씨네큐브에서 살다시피 했다.

당시 씨네큐브에는 여름마다 특정 국가나 감독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기획 상영 프로그램이 있었다. 프랑스 영화를 묶어 상영하던 그 시즌에, 나는 에릭 로메르 감독의 〈녹색 광선〉을 처음 보았다.

에릭 로메르는 프랑스 누벨바그를 대표하는 감독이지만, 동시대의 다른 감독들처럼 형식적 과시나 정치적 제스처를 앞세우지 않았다. 그는 말과 침묵, 선택과 망설임처럼 일상 속에서 미세하게 흔들리는 인간의 태도를 집요하게 바라본 감독이었다. 특히 인간이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방식, 도덕과 욕망 사이에서 주저하는 순간을 끝까지 따라가는 데 집중했다.

〈녹색 광선〉은 로메르의 연작 ‘희극과 격언(Comédies et Proverbes)’ 시리즈 중 네 번째 작품이다. 이 연작에서 그는 매번 하나의 짧은 격언을 제시하고, 그 격언이 실제 삶 속에서 어떻게 흔들리고 어긋나는지를 보여준다. 이 영화 역시 어떤 결론을 향해 밀어붙이지 않는다.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망설임 자체가 이 영화의 핵심이다.

영화의 주인공 델핀은 여름 휴가를 맞았지만 함께 떠날 사람이 없다. 사람들 속에 섞여 있어도 늘 어딘가 어긋나 있고, 모임 속에서도 혼자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휴가지가 바뀌어도 고독은 따라다닌다. 영화는 그 상태를 설명하지도, 해결하려 들지도 않는다. 그저 오래, 묵묵히 따라갈 뿐이다.

‘녹색 광선’은 바닷가에서 해가 질 때 아주 드물게 나타난다고 전해지는 빛이다. 줄 베른의 소설에서처럼, 그 빛을 본 사람은 자신의 진실한 감정을 보게 된다고들 말한다. 영화 속에서 그 빛은 거의 마지막에 가서야 모습을 드러낸다. 그전까지 영화는 기다림이고, 망설임이며, 어긋남이다.

이 영화가 내게 깊이 남은 이유는 프랑스 영화라서도, 낭만적이어서도 아니었다. 그 어떤 장면도 나에게 “이렇게 느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물의 감정은 설명되지 않고, 해석은 끝까지 관객에게 남겨진다. 침묵과 머뭇거림, 말해지지 않은 감정들이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 여름, 나는 씨네큐브에서 프랑스 영화들을 연달아 보며 영화가 반드시 사건으로 밀어붙일 필요는 없다는 것을 처음으로 몸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것을 남길 수 있다는 것, 정리하지 않음으로써 사유가 시작된다는 것을 그 공간에서 배웠다.

그 이후로 나는 프랑스 영화라면 거의 본능적으로 찾아보게 되었다.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았고, 지루해도 끝까지 보았다. 중요한 것은 줄거리가 아니라 감각이었고, 그 감각을 견디는 시간이 곧 훈련처럼 느껴졌다.

이 영화 이야기를 나는 한 번도 책에 자세히 쓴 적이 없다. 다른 영화 이야기는 자주 하면서도, 이 작품만큼은 일부러 피해왔다. 너무 좋아하는 것을 말하면 내 마음의 밑바닥을 다 드러낼 것 같아서 설명의 대상으로 삼고 싶지 않았다.

이제야 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이유는 분명하다. 영화를 공부하고 만들기 위해 파리로 떠날 시점이 왔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책이라는 형식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이제는 영화 역시, 내 인생의 중요한 챕터로 세상에 함께 내보일 수 있는 때가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