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문장 패턴 분석하기
‘삭제하다’를 사용하는 패턴
앞으로 편집자 노트에서는 「AI 문장 패턴 분석하기」 연재를 이어갑니다. 이 연재는 인간의 언어 직관을 바탕으로 AI 문장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표현과 구조를 관찰하는 언어 연구의 기록입니다. 사람의 문장뿐 아니라 AI가 만들어 내는 문장 역시 하나의 언어 현상으로 바라보고, 그 안에 숨어 있는 패턴과 한계를 읽어 내려 합니다. 이는 향후 언어학자로서 인간의 언어 이해와 AI의 언어 생성 사이를 매개하는 연구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이며, 이 연재는 앞으로 한 권의 책으로 출간될 예정입니다.
‘삭제하다’를 사용하는 패턴
AI가 만들어 낸 문장을 오래 읽다 보면 사람의 언어 감각과 미묘하게 어긋나는 동사를 만날 때가 있다. ‘삭제하다’도 그중 하나다.
사람은 보통 파일이나 사진, 문서, 메시지처럼 실제로 지울 수 있는 정보나 데이터에 ‘삭제하다’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AI는 이 말을 기억과 감정, 관계, 역사, 서사처럼 물리적으로 삭제할 수 없는 대상에까지 쉽게 확장한다.
불필요한 감정을 삭제한다.
그 기억을 자신의 삶에서 삭제하려 한다.
서사에서 우연성을 삭제한다.
인물의 인간적인 면모를 삭제한다.
역사에서 특정 집단의 목소리를 삭제한다.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은 아니다. 무엇인가를 없애거나 배제한다는 뜻이라는 사실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의 언어에서는 상황에 따라 다른 동사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기억이라면 ‘지우다’나 ‘잊다’, 감정이라면 ‘억누르다’, 서사의 요소라면 ‘제외하다’나 ‘배제하다’, 기록이라면 ‘누락하다’처럼 각각의 상황에 맞는 말이 존재한다.
AI는 서로 다른 종류의 사라짐을 ‘삭제하다’라는 하나의 동작으로 묶는 경향을 보인다.
이때 문장은 정확한 뜻을 전달하면서도 어딘가 디지털 편집 화면을 떠올리게 한다. 기억과 감정과 역사까지 마치 선택한 뒤 버튼 하나로 지울 수 있는 정보처럼 다루어지는 것이다.
디지털 동사가 추상적인 세계로 이동할 때
‘삭제하다’는 현대의 정보 환경과 매우 밀접한 동사다.
우리는 컴퓨터에서 파일을 삭제하고, 휴대전화에서 사진을 삭제하며, 메신저에서 대화를 삭제한다. 삭제의 대상은 대체로 분명하고, 그 행위 역시 구체적이다.
그러나 AI 문장에서는 삭제의 대상이 추상적인 영역으로 이동한다.
과거의 기억을 삭제한다.
관계에서 감정을 삭제한다.
사회에서 차이를 삭제한다.
작품에서 현실성을 삭제한다.
역사에서 불편한 사실을 삭제한다.
이때 각각의 ‘삭제’는 실제로는 서로 다른 현상을 가리킨다. 기억은 잊거나 억압할 수 있고, 감정은 감추거나 배제할 수 있으며, 차이는 지우기보다 무시하거나 획일화할 수 있다. 현실성은 약화될 수 있고, 역사적 사실은 기록에서 누락되거나 의도적으로 배제될 수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을 ‘삭제’라고 표현하면 차이가 사라진다.
무엇이 어떤 방식으로 없어졌는지를 설명하는 대신, 하나의 디지털 동작이 여러 의미를 대신하게 된다.
‘삭제’라는 하나의 디지털 동작으로 바꾸어 표현한다.
‘삭제하다’를 더 정확한 문장으로 바꾸기
‘삭제하다’가 등장하는 문장을 고칠 때는 먼저 무엇이 어떻게 사라졌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그는 그 기억을 삭제하려 한다”는
“그는 그 기억을 잊으려 한다” 또는 “그 기억을 머릿속에서 지우려 한다”라고 쓸 수 있다.
“작품은 인물의 감정을 삭제한다”는
“작품은 인물의 감정 표현을 의도적으로 절제한다”라고 바꿀 수 있다.
“사회가 개인의 차이를 삭제한다”는
“사회가 개인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획일적인 기준을 강요한다”라고 쓸 수 있다.
“역사에서 특정 집단의 목소리가 삭제되었다”는
“역사의 기록에서 특정 집단의 목소리가 배제되었다”라고 쓸 수 있다.
“서사에서 우연성을 삭제한다”는
“서사의 전개에서 우연한 사건을 의도적으로 배제한다”라고 바꿀 수 있다.
이렇게 바꾸면 같은 ‘없어짐’이라도 그 성격이 달라진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언어는 사라짐의 방식도 구별한다. 지우는 것과 잊는 것은 다르고, 배제하는 것과 누락하는 것도 다르며, 억누르는 것과 제거하는 것도 같은 행위가 아니다.
AI가 ‘삭제하다’를 사용하는 문장을 만났다면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무엇이 실제로 사라진 것인가.
그것은 지워진 것인가, 잊힌 것인가, 배제된 것인가.
‘삭제하다’를 다른 동사로 바꾸면 의미가 더 정확해지는가.
이 질문을 거치면 하나의 디지털 동사에 묶여 있던 여러 의미가 다시 분리된다.
인간의 삶에서 사라지는 것은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좋은 문장은 그 차이까지 구별해서 말한다.